언어 공부는 교육의 처음이자 끝이다.
직장에서 업무연찬 목적으로 강의가 있는 날이다. 외부에서 강사 두 분을 초청했다. 업무 특성상 재미없는 강의가 예상되었지만 의무 교육이라 빠질 수 없었다.
첫 번째 강사는 이쪽 분야에 30년 넘게 종사하고 1년 전에 퇴직하신 분이다. 나름대로 수강생에게 흥미를 끌어보려고 수업 준비를 해 온 흔적이 엿 보였다. 질문도 하고 예시도 들어가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대로 나의 수업태도는 좋았다. 강사에 호응하며 2시간을 그렇게 흘려갔다.
다음 수업이 문제였다. 강사는 해당분야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현직 전문가(?)이다. 역시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루하고 힘겨운 2시간을 보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톤의 강사 목소리가 공기 입자형 수면제로 변해 코로 들어온 느낌. 딱딱한 고목나무 수업이 따로 없었다.
수업 중에 고민이 생겼다. 강의실을 떠나야 할지 아니면 지루한 수업을 계속 들어야 할지. 재미없는 수업을 계속 듣자니 시간이 아깝고 강의실을 나가자니 동료들의 눈치가 보였다. 고민하다 2시간을 때웠다. 지루함 그 자체였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여러 번 본 불량 학생이 되었다. 왜 강의가 지루했을까. 이유는 강사와 수강생 간 쌍방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言語)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한다. 의사소통은 언어로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작가Writer), 그 글을 읽는 사람(독자reader), 말하는 사람(화자speaker) , 그 말을 듣는 사람(청취자listener) 중에서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
의사소통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작가와 화자는 독자와 청취자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하고 말을 해야 한다. 반면 독자와 청자는 작가와 화자의 글과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미 글과 말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의사소통의 기본이고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잘한다는 것은 언어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앞서 말했듯이 말과 글은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이 발달된 작가나 화자는 독자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쓰고 청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한 어휘와 문장을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이다.
또한 언어가 풍부한 독자나 청자는 작가와 화자가 쓴 글이나 말을 잘 알아듣고 이해한다. 이들은 문해력과 이해력이 높은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직업이 변호사이다. 법률가도 언어를 열심히 배운 결과 언어능력이 우수한 사람이다.
오늘 강의가 왜 지루했을까? 강사의 언어전달 스킬 부족과 수강생의 듣고자 하는 의지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언어능력 부족이다. 강사가 정확히 강의분야 언어를 알았다면 텍스트를 보지 않고 강의를 했을 것이고 잘 이해되는 재미있는 강의를 했을 것이다.
배움의 기본은 언어 공부이다. 언어 공부는 교육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실 배운다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고 안다는 뜻이다. 법률 용어를 알고 이해한 사람이 사법고사 패스하고 판검사, 변호사가 된다. 의학 용어를 이해 못 하는 의사는 없다. 경제, 경영, 회계 등의 용어를 잘 알아야 투자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에 능숙한 사람은 사회 엘리트층에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피지배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어에 능숙한 자가 그 시대의 리더 역할을 해 왔다. 철학자. 수학자, 작가가 대표적인 언어에 능통한 직업이다. 홍길동이 서자(庶子) 임에도 언어(言語)를 알았기에 지배층 양반계급에 대들 수 있었다.
의사소통을 넘어 수준 높은 공감 능력을 원한다면 언어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언어 공부에 알맞은 방법이 독서와 글쓰기가 있다. 사회경제적 지위는 대체로 언어능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ps)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인터넷 단어장을 오갑니다. 단어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단어나 이해가 덜 가는 단어가 나오면 바로 단어를 찾아봅니다. 읽기 쉬운 글을 써서 독자와 의사소통을 잘하고 싶은 저의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