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며느리
명절 때면 우리 가족은 하루 전에 자동차로 2시간 걸리는 아버님 댁에 갔었다. 보통은 오전에 도착했고 점심을 먹고 아내는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어머님과 함께 읍내에 있는 방앗간, 채소 가게, 마트에서 떡이며 생선, 야채, 과일, 음료, 고기 등을 사 왔다. 오후에는 본격적으로 조기, 병어 등 생선을 찌고 고사리, 시금치 등 나물을 무치고 육전, 명태전, 동그랑땡을 프라이팬에 튀기는 등 명절 음식을 만들었다.
어머님은 22살 꽃다운 나이에 멋모르고 장남에게 겁 없이 시집을 오셔서 80이 넘을 때까지 명절 차례상과 제사 음식을 장만하셨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농사일과 함께 집안 허드렛일은 모두 어머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찾아온 명절이 과연 행복했을까. 명절뿐만 아니라 조상 제사 날도 일 년에 3번 있었다. 그리고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제삿날이 일 년에 5번으로 늘어났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장남이야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많아 그런대로 제사상을 차린다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형편에 제사 음식 장만은 어머님에게 힘든 가사노동이었을 것이다.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 명절 차례상과 제사 음식은 어머님 혼자서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고 나서야 어머님에게 주방 보조가 생겼다. 그 주방 보조원은 바로 아내였다. 2년 전 어머님이 병상에 누으시자 자연히 큰며느리인 아내가 어머님 뒤를 이어 명절 음식과 제사 음식을 만들었다. 30년 가까이 어머님 곁에서 보고 배운 덕에 아내의 음식 만드는 솜씨는 일취월장해 갔다.
그런데 지난 여름 어느 날, 아내는 올 해부터 명절 차례상을 차리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아내의 선언에 한 순간 나는 꿀 먹을 벙어리 되었지만 이내 "그래 알았어요."라고 동의를 했다. 제례 의식이 뭐 그리 중요한가. 마음으로 조상을 기르면 되지 꼭 차례상을 올릴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명절 차례상을 포기했다.
아내 입장에서 억울한 면이 있다. 장남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30년 동안 명절 연휴에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시댁에 잡혀 시어머님과 명절 음식을 만드는 일은 아내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가끔 명절 가사 노동으로 짜증 내고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명절 전날 시댁에 가기 위해 고속도로 매표소를 지날 때면 항시 아내는 입버릇처럼 "머리 아파"라고 말했다. 둔한 나는 명절 증후군을 앓은 아내의 고충을 오랫동안 헤아리지 못했다.
그런데 아내의 마음이 바뀌었다. 결혼해서 30년 동안 조상을 기리는 차례상을 중단하다는 게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아내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나타났다고 말하며 차례상 중단을 철회하고 명절 음식을 장만하기로 마음을 바뀌었다.
남들은 명절 연휴에 여행 다니고 하다못해 영화 보고 외식하며 연휴를 즐기는데 직장 맘인 아내는 시어머님 곁에서 명절 음식을 만들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았겠는가. 이런 가사노동을 30년간 했으니 불만이 나올 법도 하다. 그렇다고 누가 이런 가사노동을 알아주지도 않는다. 차남이나 사촌은 큰며느리가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처럼 여긴다. 삼촌, 사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차례상과 제사 음식을 홀로 준비하셨던 불상한 어머님을 수십 년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결혼 후 아내는 갓 태어난 애들을 데리고 낯선 시댁에 와서 고되게 음식 장만을 했다.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애들은 울고불고 시어머니는 이것저것 시키고 삼시세끼 밥상 차리고 설거지를 하였다. 나 같아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주둥이가 쭉 나왔을 것이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의문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내의 고달픔을 헤아리지 못한 남편이었다.
30년간 추석, 설명절 연휴에 힘든 가사노동을 하며 보낸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래서 아내의 차례상 중단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이른 아침 차례상 음식 재료를 사기 위해 농수산물 시장 가는 차 안에서 아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여보"라고 불렸다. 아내는 "왜요"라고 묻는다. 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냥 여보라고 불러보고 싶었다. 미안해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