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필리핀 유학 2

kddhis 2023. 12. 4.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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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전날 저녁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필리핀 공항에 동이 뜨기 전에 도착했다. 우리는 승합차를 타고 지방교육도시(뉴에바 비스카야 바욤봉)로 출발했다.

 

 

우리 가족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루손섬 북쪽에 있는 바욤봉으로 한참을 갔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뉴에바 비스카야 바욤봉 까지 거리는 약 280km인데 승용차로 530분쯤 걸린다. 그 긴 시간 동안 피곤하기도 하고 새벽이어서 승합차 안에서 대부분 졸았다.

 

 

산기슭 어느 지점에서 기사님(필리핀 사람)이 잠깐 정차를 했는데 나뭇잎(바나나 잎으로 추정)에 찰밥을 싼 간식을 먹은 기억만 난다. 산을 넘고 얼마나 갔을까 우리가 기거할 주택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 전후였다. 우리를 기다리는 주택은 2층 건물로 우리 부부가 다닐 대학교 후문 쪽에 있었다.

 

 

4개나 5개의 똑같은 주택을 연이어져 있었는데 중간에 위치한 주택이 우리가 임대하기로 예약되어 있는 주택이었다. 집 앞에는 이름 모를 큰 나무가 있었고 문 앞에는 물 펌프 수도가 있었는데 딱 한 번 펌프 물로 아이들에게 등목을 시켜주었다.

 

 

주택 1층은 큰 거실과 부엌, 그리고 부엌 옆에 화장실이 있었다. 1층과 2층이 연결된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흰색 페인트로 색칠해져 있었다. 2층에는 방이 2개 있었는데 우리는 작은 방은 사용하지 않았고 우리 식구 4명은 큰방에서 함께 잠을 잤다..

 

 

1층 거실은 시멘트 바닥이었다. 나중에 장판을 깔았지만 처음에서 맨바닥이었다. 에어컨은 없었고 선풍기 2대를 틀어놓고 살았다. 에어컨이 없었지만 그리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풍기로 열대야 더위를 이겨 내며 살았다.

 

 

방에 한국에서 가져온 모기장을 치고 잠을 잤다. 날 파리를 막기 위해서였다. 염려했던 모기는 없었다. 동남아 집에서 볼 수 있는 도마뱀 게코(gecko)가 가끔 출몰하곤 했다. 누워서 천장에 있는 게코를 보고 있으면 게코는 움직이지 않다가 우리가 보지 않으면 어느새 없어지곤 했다.

 

 

플라스틱 테이블 2개와 행사용 의자를 구입하여 책상과 밥상으로 이용했다. 각종 식재료나 생활품은 인근 도시 솔라노에서 구입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인 트라이시클(삼륜자동차)을 타고 다녔다.(당시 지방에서는 택시가 없었고 트라이시클이 택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20분 정도 타고 가면 솔라노라는 상업도시에서 식료품 등 각종 물건들을 구입했다. 트라이시클을 타고 우리 가족은 가끔 솔라노에 가서 외식도 하고 쇼핑도 했다.

 

 

바욤봉은 뉴에바 비스카야 주의 주도시며 교육도시이다.  솔라노는 상업도시로 두 도시가 인접해 있었다. 바욤봉에는 뉴에바 비스카야의 캐피털(관공서)이 있었다. 캐피털 앞 광장 공원으로 놀러 갔다가 전화로 피자를 주문 배달시켜서 먹기도 했다.

 

 

바욤봉과 솔라노에 사는 한국 사람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우리가 다닌 세인트메리스대학교에도 한국 남학생 2명이 다녔고 솔라노에 한인교회가 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오신 분이 목사님의 사모님이셨다.

 

 

목사님의 아들은 대학생이었고 딸은 고등학생 나이였는데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따님은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일에 우리 가족은 교회를 갔다. 교회 설교가 끝나면 목사님 집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아이들은 사립학교 구몬 스쿨에 입학했다. 등하교는 트라이시클을 타고 다녔다. 우리가 사는 주택가에 한쪽에 항시 트라이시클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집을 나서 트라이시클이 모여 있는 쪽으로 손짓을 하면 트라이시클 기사들이 눈치채고 우리를 태우고 다녔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은 구몬 스쿨을 입학 한지 얼마 안 돼서 메소디스트 스쿨로 옮겼다.(아내는 왜 학교를 옮겼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외국인 우리는 처음에 현지 상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알아가면서 상황에 맞춰 적응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선택하지 않고 이 먼 지방으로 유학 온 이유는 한국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가야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이곳 바욤봉 지방도시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언어 환경에 우리 부부는 놀랐다. 바욤봉 사람들은 학교에서는 영어로 공부하고, 일상에서는 따갈로그어나 지방어를 쓰고 있었다. 나중에 지방보다 수도 마닐라가 영어를 배우는데 좋겠다 싶어 8개월 후에 마닐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처음에 학교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말소리가 윙윙거리는 벌레 소리로 들렸다고 말했다. 2개월 정도 지나서야 영어가 들렀다고 아들은 나중에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점심때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으로 내려와 점심을 먹이고 다시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무렵에 다시 데리고 왔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학교에 픽업하는 일이 내 임무였다. 아내는 음식 만들고 밥 챙겨 주는데 많이 시간을 썼다.

 

 

우리는 학교의 영어교육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 선생님 중에 UP(유니버시티 필리핀 /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 출신 여선생님을 만났고 그 선생님 댁에서 아이들이 과외를 받았다.

 

 

여선생님의 이름은 그레이스다. 그레이스 선생님은 전형적인 필리핀 사림이며 남편은 중국인이었다. 시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중국인 시어머님과 셋이서 살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방과 후에 우리 아이들을 매일 가르쳤다. 필리핀 역사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그레이스 집으로 데라가 과외수업을 받게 해 주기도 했다. 필리핀 역사시간에는 영어를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레이스에게 오전에 영어를 배웠다. 우리 가족 4명 중에 내가 제일 영어 듣기 말하기 실력이 떨어졌다. 나는 준비 없이 유학을 온 것이다. 영어가 안 돼 수업시간이나 학업에 참 힘들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대학원을 함께 다녔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두려움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난생처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박한 필리핀 지방도시 바욤봉에서 8개월을 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바욤봉이 참 괜찮은 안전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낯선 곳에 불안한 마음으로 너무 지려 겁을 먹고 움츠리고 바욤봉에서 생활했던 게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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