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어머님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어머님은 한국전쟁 날리 통에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되어 작은아버님 댁에서 자랐다고 들었다. 어머님이 10살에 부모 없는 고아가 된 것이다.
어머님은 막내딸로 언니 2명, 오빠가 한 분 계셨다. 그런데 둘째 언니는 6.25 전쟁 때 죽었고 큰언니도 일찍 돌아갔다. 세상에 어머님의 피붙이는 오빠 하나뿐이었다.
어머님은 22살에 장남인 아버님과 결혼하셨다. 어머님이 시집와 보니, 시아버지(나로 치면 할아버지)는 아파서 누워계시고 시동생 5명이나 있었다. 결혼 당시 아버님은 24살이었고 시동생들의 나이는 각각 22살, 20살, 16살, 14살, 11살, 10살이었다고 한다.
남자만 와글거리는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온 것이다. 어머님 입장에선 최악의 시집살이였을 것이다. 불쌍한 어머님.
다시 말해 어머님은 결혼하자마자 어린 시동생을 돌보며 힘든 시골 농사일을 하며 모진 시댁 생활을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결혼하고 몇 달 만에 아버님은 군대에 가버렸다. 불쌍한 어머님,
그런데 어머님의 오빠는 부산에서 모직공장을 직접 하셨는지 아니면 공장장을 하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부자로 사셨다.
내 어린 기억으로는 외삼촌(어머님의 오빠)은 사촌 형제들과 함께 검은색 승용차 여러 대를 몰고 우리 집에 가끔 들렀다.
1960년, 1970년대 시골은 먹고살기 힘든 시기였다. 시골사람이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 속의 일처럼 느꼈던 시대다. 다시 말해 당시 외삼촌은 잘 사는 부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살림살이가 궁색한 어머님은 왜 잘 사는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오늘 마음먹고 어머님께 물었다.
“엄마, 살기 힘들 때 부자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님은 대답이 없으시다.
“ 오빠에게 왜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말 없는 어머님에게 재차 물었지만 어머님은 묵무무답이다.
오히려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눈물까지 보이 신다.
어머님은 오빠 성격을 알아서일까.
도움을 청해도 오빠는 여동생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처음부터 아예 부탁하지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나밖에 없는 친여동생이다. 오빠가 인정이 있고 여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시골에서 고생하는 여동생을 힘들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에서 궁색하게 사는 여동생이 먼저 도움을 청하기 전에 오빠가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1960년대는 그래도 가족 간에 정이 있던 시절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 피붙이라고는 오빠와 여동생 둘, 남매뿐이었으니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여동생이 부탁하지 않아도 농촌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는 여동생을 방치해 놓는 게 말이 되는가. 오빠가 알아서 동생을 챙겨주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부자 오빠는 여동생을 돕지 않았다. 가끔 외조부모의 제삿날에 부산에 내려가면 외숙모는 우리들(조카)에게 옷을 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외삼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번은 아버님과 어머님이 말다툼을 하셨는데 아버님이 어머님의 오빠가 도와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는 말투로 내색을 하셨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외삼촌이 잘 살 때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에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느낌이나 감정을 받게 마련이다. 즉 외삼촌이 도움을 주지 않아서 서운한 감정을 아버님도 어머님도 나도 똑 같이 느꼈던 것이다.
현재 외삼촌도 어머님처럼 치매 증상이 있으시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는 팔순이 훌쩍 넘은 노인이 되셨다.
세월이 유수같이 흘려 한때 검은색 승용차를 몰고 다녔던 부자오빠도 가난한 찌들어 허리가 90도로 굽으신 시골살이를 견디며 산 가난한 여동생도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이렇듯 두 남매는 각자의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즉 두 남매는 잘 살든 못 살든 간에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고 수억만금을 가진 사람도 결국 다 놓고 떠나야 한다. 1원도 갖고 갈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육신까지 놓고 떠나는 유한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단지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