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잡초를 보며 깨달은 것

kddhis 2024. 5. 11. 18:30
728x90
반응형

새벽 5시 30분, 저녁에 비가 온다기에 지난주에 마무리하지 못한 채소 모종 심는 작업을 위해 눈을 뜨자마자 밭에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아삭이 고추 3개와 고구마 한 다발(100개)의 모종을 심었습니다.

 

 

오늘 아내가 투자 세미나에 참석하는 날이라 서둘러 밭일을 끝냈습니다. 아침밥 먹고 아내를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고 나는 다시 밭에 왔습니다. 비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참외, 고구마 등 채소를 심은 두둑 사이의 고랑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제초 매트를 까는 작업입니다.

 

 

아마추어 농부에게 제일 신경 쓰이는 게 잡초입니다. 5월부터 본격적으로 풀이 돋아 납니다. 손톱만큼 조그만 새싹 풀이라고 무시했다가는 밭이 풀밭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밭을 일구면서 풀의 생명력이 이토록 강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5월을 지난 6월, 7월 우기가 시작되면 잡초와 길고 지루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잡초에게 패배한다면 결과는 처참합니다.

 

 

만약 잡초가 승리를 한다면 힘들게 심어놓은 땅콩, 참외, 토마토는 잡초에 에워쌓여 보이지도 않습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잡초가 토양의 영양분을 다 빨아먹었는지 잡초는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데 채소는 몇 달을 굶은 아프리카의 어린아이처럼 힘말테기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정성스럽게 비료 퇴비 섞어 영양가 높은 토양을 만든 다음 농사용 검정비닐까지 씌워 작물이 잘 자라도록 두둑이란 공간을  마련해 주었는데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잡초에 그 영역을 내주는 꼴이라니. 참 어처구니없습니다. 농부 탓일까 아니면 농작물 탓일까, 아리송합니까. 밭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농부의 잘못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원인은 작물과 잡초의 태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작물은 농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보호받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잡초는 스스로 자생하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농작물은 농부의 도움 없이는 자기 스스로 자랄 수 없는 식물입니다. 농작물은 전적으로 농부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식물입니다. 즉 농작물의 죽고 사는 문제는 농부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작물과 같이 의존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잡초처럼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농작물처럼 남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고 후자는 스스로 자립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이 더 잘 살까요. 우리는 잡초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한 번 떠나면 다시 못 올 이생입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능력을 키워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풀이 지겹도록 싫지만 잡초에게서 소중한 인생 교훈을 배웁니다. 

 

 

자립심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립심의 영향력은 엄청 강력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자립 능력은 경제력과 직결되는 경쟁력이기 때문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자립 능력에 따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결정짓습니다. 

 

 

국가도 개인과 똑같습니다. 국방의 자립, 경제적 자립, 기술 자립, 식량 자립,,,. 이게 없으면 비참한 타국의 식민지가 되는 겁니다. 목숨 걸고 자립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국가이든 개인이든 스스로 자립하려면 역량을 키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 없습니다.  

 

 

자립을 강조하는 멋진 글을 소개합니다. 제 가슴을 울리는 글입니다. 그 유명한 책 <육일약국>의 저자이며 메가스터디 부회장 김성오 회장의 아버님 말씀을 전하면서 글을 맺겠습니다. 참고로 김성오 회장님의 아버님은 가난한 목사이셨지만 베푸는 삶을 사셨다 합니다.

 

 

얻어먹는 근성을 경계하라.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얻어먹으려고 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자립해서 오히려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