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은 결국 죽는다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 수업은 내일까지 이틀간이다. 수업시간은 아침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 30분경에 끝난다.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강의를 들으니 온몸이 쑤시고 답답해서 수업이 끝나자 밖으로 나왔다.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아 주택가는 조용하고 한가했다. 속된 말로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주택가에 저 멀리서 유모차 같은 보행기에 의지해 걸어오는 어른이 보였다. 어르신은 내쪽으로 보행기를 밀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스쳐가는 노인네의 얼굴에서 험한 세상 풍파가 느껴졌다. 어르신의 얼굴은 찌그러져 있었고 조폭처럼 얼굴에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있었다.
그 생각도 잠깐, 나는 가던 길을 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 하늘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주택가를 나와 대로변 인도 길을 따라 걸었다.
도로 바닥에는 회색 낙엽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바짝 마른 낙엽은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불규칙적으로 나부끼며 거리를 무질서하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낙엽은 모르겠지만 낙엽은 거리를 청소하시는 분이 제일 싫어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무들은 색칠한 듯 울긋불긋 칼라풀해 보였다. 나뭇잎들이 노란 빨간 주황색 등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지금 계절은 "가을이다."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푸른 잎을 간직한 소나무도 보였다.
앞으로 몇 주만 지나면 끈질기게 나무에 매달여 있는 잎들도 바닥에 떨어져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사오월을 지나면서 새순은 이파리로 자라고 뜨거운 계절에는 잎은 넓힐 대로 넓힐 것이다. 이렇게 잎이 자라다 보면 어느새 나무와 헤어질 계절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이파리의 생의 주기이고 운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에 영원히 생존하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뭇잎처럼 모든 지구상의 생물은 시간이 지나면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태어나면 죽음이란 종착역으로 서서히 또는 빠르게 달려가는 기차와 같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종착역을 비켜갈 수 없다. 시간이 되면 꼭 그 역에 도달하게 된다.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 거동불편한 노인도 단풍나무도 똥개도 너도 나도 죽음의 종착역 이르게 된다. 예외는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답 없는 '인생허무, 일장춘몽' 등을 논하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추가하자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기 전에 "왜 사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요즘 집이나 직장에서 "왜 사는 걸까?"라는 말을 농담처럼 진담같이, 진담처럼 농담같이 아내나 직장동료, 지인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왜 사는 걸까에 대한 답을 빨리 얻을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인생 종착역에 도착할 때 조금이라도 덜 인생허무를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후회 없는 인생을 바라지 말고 가능한 한 후회를 줄여보도록 노력하자. 그게 인생 잘 사는 방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