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경운기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kddhis 2024. 11. 1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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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77월에 군대를 마치고 식당과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문득 이렇게 알바 생활을 계속하다가는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것 같고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85월 따사로운 봄날에 나는 알바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 위해 잠시 고향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그 해에는 서울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역사적인 연도이기도 했지만 공부하기로 독하게 마음먹은 나에게도 특별한 쌍팔년도이기도 했다. 그때 그 결정이 지금의 직장에서 33년을 근무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날씨가 좋아서 나는 반바지 차림으로 집 밖을 돌아다녔는데 아주 보수적인 어머님은 팬츠 같은 반바지를 걸치고 다닌다고 나게 눈총을 주었던 흐릿한 기억과 둘째 동생이 입대를 앞두고 집에 와 있었던 것 그리고 우리 집에 처음으로 경운기가 들어와서 내가 맨 먼저 경운기 운전을 배웠던 것 말고는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아버님은 그때부터 경운기 운전을 하셨고 그로부터 약 32년 후 부주의하게 운전한 운전자의 차량에 아버님의 경운기가 치여 교통사고를 당하셨던 2019년 가을 어느 날까지 경운기와 한 몸이 되어 지내셨다.

 

 

아버님에게 경운기는 농약을 뿌리는 농약 분무기였고 쌀가마, 비료 등을 실어 날리고 논밭을 가는 농기계였고 농산물시장으로 딸기, 수박 등을 실어 날리는 화물차였으며 읍내에 볼일 보러 갈 때 타고 다니는 탈 것이었다. 한마디로 경운기는 아버님의 손과 발이 되어 준 투박한 비이클(vehicle)이었다.

 

 

요란한 경운기 소리는 아버님이 들녘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아버님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알려주는 신호였다. 이윽고 경운기가 집 마당에 들어오면 경운기 엔진을 끌 때까지 나의 청각 기능은 정지 모드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경운기 소음 때문에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팔순의 나이에 경운기 핸들을 좌우로 돌리기가 힘들었을 텐데도 그 육중한 경운기를 몰고 다니셨는데  32년 운전 경력이 경운기 핸들 조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허름한 옷에 농약 회사 로고가 그려진 차양 모자를 쓰시고 경운기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버님은 내가 처음 1988년에 운전한 이후 단 한 번도 나에게 운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즉 자신의 농사일을 자식에게 시키지 않으셨다. 그만큼 자립심이 경운기처럼 강하셨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경운기 소리처럼 크셨다.

 

 

아버님에게 경운기가 있었기에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경운기는 아버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농업용 기계이며 필수 이동 수단이었다. 소음 대장 경운기는 아버님이 유일하게 운전할 수 있는 동력 비이클(vehicle)이었다.

 

 

지금도 빨간 엔진의 경운기를 볼 때면, 팔순의 아버님이 육중한 경운기를 운전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나에게 아버님 기억의 스냅사진은 경운기를 타는 모습이고 경운기를 보면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굽히고 경운기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버님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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