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좋아하게 된 사연
나는 어려서 농사가 시작되는 봄부터 추수가 끝나는 가을까지 들판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소득도 시원찮은 농사일로 뼈 빠지게 밤낮없이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봄, 여름, 가을보다 겨울을 좋아합니다. 내 어릴 적 70년대에는 겨울에는 농사일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일없이 놀 수 있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에는 진달래 피고 들판에 노란 개나리가 보일 때면, 아버님은 소를 몰고 들에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쟁기 손잡이를 잡고 소가 쟁기를 똑바로 끌도록 재촉하셨습니다. 아버님은 경운기를 사기 전까지 봄마다 쟁기로 로타리를 쳤습니다.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논의 흙을 고르게 만드는 일을 ‘로타리 친다.’라고 합니다.)
쟁기질하는 비슷한 시기에 아버님은 논 한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여러 개의 못자리를 이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못자리에 뿌려놓은 볍씨가 푸른 모종으로 자랍니다. 그러면 못자리에서 녹색의 모를 뽑아서 묶음을 만들어 노타리를 쳐 놓은 논으로 가져가 모를 심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양기가 보급되기 전, 70.80년대까지 사람 손으로 직접 모를 심었습니다. 그 넓은 논에 모심는 일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힘들 작업이라서 동네 이웃들과 푸마시(오늘은 개똥이네 모심기, 내일은 소똥이네 모심기, 모래는 말또이네...) 해서 합동으로 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모를 심은 다음에 잘못 심어진 모나 빼먹고 싶은 곳을 찾아서 그곳에 모를 보충해 주었습니다.
모심기가 끝이 나면, 벼농사 중에 가장 힘든 일은 바로 무더운 여름부터 농약을 치는 작업입니다. 1970년이나 1980년경에는 밀고 당기는 수동식 농약 분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어머님과 나는 수동식 농약 분무기를 사이에 두고 분무기를 밀고 당겨서 그 압력으로 농약 통의 농약을 호스로 나가게 하고 아버님은 호스 헤드로 벼 사이를 오가며 농약을 뿌렸습니다. 나는 무더운 여름에 몸에 좋지 않은 독한 농약 치는 일이 제일 싫어했습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가물면 양수기로 논에 물을 대야 했고 폭우가 내리면 논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농수로를 제대로 관리해야 했습니다. 논에 물을 대는 일은 밤낮이 따로 없습니다.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간에 비가 쏟아지면 농부는 논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가끔 논에 물 대면서 이웃과 싸움을 하곤 했습니다. 가물 때는 자기 논에 물을 넣으려 하고 폭우 때는 자기 논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데, 서로 자기 논에 유리하도록 농수로 물의 흐름을 바꾸다 보니, 아무리 친한 이웃이라도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막말하고 몸싸움하고 고소하여 경찰서까지 들락거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개월을 정성스럽게 논을 관리한다고 해도 태풍 한방이면 그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풍년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농업기술이 발전되었고 벼 품종개량이 되었는데도 농사가 날씨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물며 농업기술이 형편없던 그 시절에 농사는 날씨에 더더욱 의존했었습니다.
쌀농사가 일이 이게 끝이 아닙니다. 추석 무렵에 누렇게 벼가 익어갑니다. 이제 농부가 할 일은 벼를 베는 일입니다. 이양기가 나오기 전에는 낫으로 직접 벼를 베었습니다. 오직 낫이란 농기구를 가지고 농부의 근력으로 벼를 한 묶음씩 일일이 베었습니다.
이게 끝일까요. 논바닥에 베어놓은 벼를 건조해야 합니다. 이제. 쌀농사 일이 끝이 보입니까. 아직 몇 단계가 더 남아있습니다.
벼를 묶어야 합니다. 베어진 벼를 모아 볏단을 만듭니다. 그리고 한 곳으로 모읍니다. 이제 할 일은 탈곡입니다. 그 시절의 수동식 탈곡기에 달린 발판을 발로 밟으면 모터 탈곡기가 작동하는데, 발로 탈곡기를 작동시키면서 동시에 원통 모양으로 둥근 게 돌아가는 곳에 볍 단을 넣으면 벼 줄기에서 볍씨가 분리되어 탈곡기 앞 바닥에 떨어집니다.
이렇게 볍씨가 벼 줄기에서 분리되면 벼를 가마니에 담고 볏단을 묶습니다. 볏단을 “지푸라기”라고 부릅니다. 가마니와 지푸라기를 집으로 가져옵니다. 지푸라기는 소의 먹이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벼를 건조해야 합니다. 집 마당이나 마을 길가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벼를 말렸습니다. 벼 건조 작업은 두세 번 반복합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오면 급하게 거둬야 합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기 전 11월경에 면사무소나 농협창고 앞에서 매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벼의 품질 등급을 매겨 매수하는 일을 매상(돈을 받고 팔다)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쌀농사 짓는 과정이 다 끝나면 겨울이 됩니다.
위에서와 같이 여러 단계에 걸쳐 힘들게 쌀농사를 짓는 노고와 수고에 비해 아버님의 소득은 겨우 우리 가족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수준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겨울을 좋아하고 봄, 여름, 가을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부모님의 농사일은 벼농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모님은 고추, 깨 고구마, 감자 등 여러 밭작물을 재배했습니다. 밭작물 재배 과정 역시 쌀농사만큼이나 번거롭습니다. 언젠가 어머님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밭일이다”라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어떻습니다. 농사일이 쉬워 보입니까. 취미 삼아 소일거리로 아주아주 소량의 농작물을 기르는 것은 몰라도 직업으로 농사짓는 귀농은 절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농사가 자기 자신에게 딱 맞는 사람은 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