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만 남기고 고향 마을이 사라질까
옛날 고향마을 이야기다. 내가 살았던 고향집의 맞은편에 언어 장애 가족이 살았었다.
부부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집 아이들은 모두 자기 부모를 닮아선지 똑똑했고 건강했으며 순했고 거칠지 않고 상냥했다.
아버지가 언어 장애자였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도 그랬고 셋째 아들과 하나밖에 없는 딸은 정상이었으나, 다섯째와 막내도 역시 말을 하지 못한 언어 장애자였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다닐 때, 그 집에 자주 가서 놀았다. 그 집이 우리 집에서 가깝기도 했고 그 집 아이들이 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집 부모님은 우리가 자기네 집 방 안에서 화투를 치고 놀았는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화투가 건전치 못한 놀이라는 것 때문에 그 집 부모가 못마땅한 눈치였고 그 집 아이들도 싫어해서 화투 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시골 아이들은 봄 여름 가을에는 들고 산, 냇가와 개울,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지만, 눈싸움하며 썰매 타던 겨울에는 밖에서 노는데도 한계가 있어 야외보다 실내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보니 달리 놀이가 없었기에 어른들이 하는 화투를 치고 놀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농촌에서 비닐하우스 등 시설 작물을 하기에 1년 365일 농부들이 바쁘지만, 내가 국민학교, 중학교 때만 해도 농사짓은 사람들은 가을 거지가 끝나고 이 뜸에 봄까지는 일 없이 놀았다. 그러다 보니, 겨울 동안 어른들은 화투를 치고 술 마시며 긴 겨울밤을 보냈다.
어른들의 이러한 행동을 배운 아이들 역시 공부대신 화투에 익숙해서 어른들 몰래 아이들끼리 모여 화투를 치며 놀았지만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도시로 떠난 이후에 더 이상 이런 저질 게임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언어 장애 가족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언제 이사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내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쯤으로 추측이 된다. 그 가족은 도시에도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내 동생과 친구인 그 집의 셋째 아들은 공부를 제법 잘해서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세월이 흘려 그는 캐나다로 이민 가 그곳에서 장애인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고 동생이 알려주었다.
이 집의 셋째는 가정환경 때문인지 말 수가 적고 소심했으며 동네 친구들이나 선후배와 잘 어울리지는 않았는데, 그런 성격을 가진 그가 교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좀 의아해했다. 말 수가 적다고 교육자가 못되라는 법은 없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나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집의 유일할 딸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읍내에 사는 잘 생긴 남자를 교회에서 만나 교제하고 결혼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이 부부는 결국 이혼했다는 안 좋은 소리도 들려왔다.
신랑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은행원이었고 신부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이쁜 이웃 누나였지만 무슨 까닭으로 이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신랑에 비해 신부의 외형적 역량(집안, 학벌, 경제력 등)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가족이 도시로 이사 가면서 그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우리 아버님께서 그 집을 잽싸게 사셔서 집을 부스고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려고 보온이 잘되는 투툼 한 가설건물을 지셨다. 그러나 느타리버섯이 잘 되지 않아 몇 번을 헛당을 쳤고 끝내 한 번도 느타리버섯 재배를 성공 못 시킨 채 돈만 낭비하다가 이윽고 버섯재배를 포기했다. 버섯재배는 아버지의 뼈아픈 실패 중에 하나로 기록되었다.
아버님은 나중에 몇 해 동안 그 버섯재배 건물을 온갖 잡다한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로 사용하시다가 마침내 그 버섯동 마저 허물고 그 땅에 감자, 고구마, 고추, 무, 배추 등을 심는 텃밭으로 수년간 사용하셨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막내 동생이 그 땅을 상속받아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1년쯤에 우리 뒷집에 사는 사촌벌 되는 인척인 동네 이장에게 팔았다. 지금은 그 땅은 비어있다. 작년에 이장이 세상을 떠났기에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다.
언어장애 가족도 떠났고 그 가족이 살던 집도 없어졌고, 땅의 소유가 여려 차례 바뀐 그곳은 여름이면 풀이 부성한 빈 공터로 남아있다. 오직 어린 시절에 놀던 추억과 아버지의 느타리버섯 재배 실패만이 남아있다.
지방이 소멸되어 간다는 뉴스가 잊을만하면 방송해서 떠든다. 새롭지도 않은데, 새로운 뉴스인양 당장이라도 지방이 없어질 것같이 야단법석이다.
우리 고향 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 거주자와 가구수가 줄어들고 집의 숫자도 줄고 있으니, 당연히 소멸을 못 면할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지방 소멸이 언제일지 알 수가 없는데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이 미래 예언자처럼 꼴 사납게 지방소멸을 대놓고 떠든다. 소멸은 사라져 없어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을이 과연 없어질까?
이처럼 요즘 지방 소멸을 한 목소리로 난발하다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소멸보다 서너 가구가 남아 고향마을을 지킬 것으로 예측된다. 단지 거주자가 줄어들지언정 누군가는 시골 논밭을 가꾸며 경제적 혜택을 누릴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놀았고 그 소리가 소음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낮시간에도 골목길에 개미 한 마리 보기가 어렵다. 특히 겨울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워 적막한 마을이 된다. 고향마을이 조용하다 못해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가끔 고향을 갈 때면 유령마을처럼 고향이 죽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무도 살기 않는 마을처럼 싸한 느낌이 든다. 이런 곳에서 젊은이들이 살 수가 있을까 싶다.
비록 누군가는 고향 마을에 남아 살 것을 확신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언어 장애 가족의 기억과 같은 옛 고향에 대한 추억만 남겨 놓고 고향 마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누군가 그런 불필요한 염려랑 하지 말라고, 씨잘데기 없는 걱정은 집어치우라고 말해줬으면 참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