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골집을 떠나 도시생활을 시작했다. 그때(1981년)부터 내 집을 갖기(2001년 )까지 20년간 전월세로 남의 집에서 살았다.
첫 셋방은 주인집 큰방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이었다. 남쪽 창문 벽에 나지막한 옷장과 벽에 못을 박은 옷걸이가 전부였던 이 방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닌 삼촌과 고등학생 나 그리고 할머니 셋이서 살았다.
부엌은 주인댁과 공동으로 썼는데 수줍음이 많은 나는 주인댁 여학생과 부엌에서 마주치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밥을 해 먹고 학교를 다녔는지 상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첫 셋방살이 생활이었다.
주인집은 3대가 살았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가족에게 심한 고통을 주고 있었다. 할머니의 엉뚱한 행동 때문에 집안이 평화롭지 않았고 온 가족이 속을 썩고 있었다. 아무 데나 똥을 싸고 가족을 못 알아보고 해코지해서 할머니를 다락방에 가둬 두었는데 할머니가 다락방을 탈출하는 날이면 집안이 한바탕 시끌벅적 난장판이 되곤 했다. 나는 딱 한번 바짝 마른 왜소한 정신 나간 할머니를 보았는데 그때 할머니의 눈빛이 섬뜩했고 무서웠다.
삼촌이 결혼한 후에는 혼자 자취방을 얻어 살았다. 주말이면 시골에 가서 쌀, 김치 등 먹거리를 가져와 밥 해 먹고 학교를 다녔다. 가끔 어머님께서 자취방에 오셔서 양은 찜통에 1주일 분량의 김치찌개를 끓여 놓고 가셨다. 김치찌개는 달짝지근하고 맛있었다.
그 후 어느 날 갑자기, 아버님은 할아버지와 다투시고 도시로 나와 연탄 가게를 하셨다. 바퀴벌레가 방바닥에 기어 다닐 만큼 허름한 창고에 딸린 비좁은 단 칸 방에서 우리 가족은 힘겹게 살았다. 동생과 나는 연탄을 배달하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한창 활달한 학창 시절, 검정 연탄 때문에 우울하게 지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칙칙한 시기였다.
1992.10.1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롯데칠성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집에서 자취를 했었다. 안채 주택에서는 선생부부와 막 결혼한 아들부부가 함께 살았고 우리는 안채 뒤 쪽 별도 건물에 월세로 살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선생님의 아들은 내가 잘 정리한 국사 요약본을 가져갔는데 돌려주지 않았다.
별도 주택건물에 방이 두 개 있었는데 우리 말고도 다른 젊은 부부가 그 방에 살았다. 우리는 서로 왕래는 없었다. 한 번은 그 젊은 부부 방 앞을 지나는데 방 안에서 부부와 채무자가 다투는 소리가 들었다. 채무자는 젊은 부부가 자기 몰래 녹음했다면 불만 섞인 말투로 거칠게 따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채무자는 아주머니였다. 그 기억이 왜 아직까지 내 머리에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면서 씨잘 때기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게 지금도 신기하다.
1994.12.25,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도 오랫동안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혼살림은 전세 18백만원하는 단독주택 2층에서 살았다. 아버님이 소를 팔아 장만해 준 전세금이었다.(몇 마리 소를 팔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귀한 전세금인 것만은 분명하다.)
결혼하고 6년쯤 지난 2001년 봄에 첫 내 집을 갖게 되었다. 아파트 입주까지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1997년 생에 첫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중도금과 잔금을 납부할 돈이 없었지만 건설회사에서 알선해 주는 아파트 대출금이 있다기에 건설사와 청약계약을 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날 벼락이 떨어졌다. 1997년 말 대한민국이 망해가는 IMF사태가 터져버렸다. 중도금 이자는 천정부지로 올랐고 불행은 불행을 낳는다고 했던가. 우리가 분양받은 아파트 시공사가 부도를 맞아 아파트 건설이 중단된 것이다.
대출해 준 은행에서 매달 꼬박꼬박 건설사로 높은 이자가 자동 납부되는데, 건설사가 짓기로 되어 있는 20층짜리 아파트가 10층에서 공사가 멈추었다. 그 바람에 우리가 분양받은 층수가 10층(1008호)인데 우리 집을 만들다가 공사가 중단된 것이다.
공사가 재기되는지 궁금해서 가끔 아내와 건설현장을 먼 곳에서 지켜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수개월 동안 건물 층수가 올라가지 않았다. 다른 아파트단지는 공사가 척척 진행되는데 우리 아파트단지만 층수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낙천적 이어서 걱정이 안 되었는지 아니면 뭘 몰라서 태평 헸는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후자에 가까웠다.
다행히 시공사가 재선정되고 공사가 재기되어 마침내 2001년 3월이나 4월에 입주를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그 아파트에서 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아파트가 내가 셋방살이에서 탈출한 첫 내 집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 20년 동안 전월세로 전전하다가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사실 아파트 입주한 그날이 길고도 긴 셋방살이 인생을 청산하는 뜻깊은 날이었는데 불구하고 그때는 아들 둘 키우느라 사무실 일에 집중하느라 아내와 기싸움하느라 맞벌이하느라 정신없이 사는 바람에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때 그런 나는 불쌍한 중생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자축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멍청이가 따로 없다.
돌이켜 보면 돈이 없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동안 내 집을 갖는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은 시절을 보냈다. 내 집을 갖는 것이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집 갖는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집을 사는데 한두 푼 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MZ세대가 돈 없어 집 때문에 결혼을 포기한다는 말을 하는데 우리 젊을 때도(1980년-1990년대) 집 사는 것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별 따기만큼 먼 남의 일처럼 느껴져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집 장만에 관심을 갖고 방법을 찾은 다면 분명히 길은 있다. 믿으시라. 내 집 갖는 게 멀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셋방살이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라. 그러면 전월세에서 남들보다 더 빨리 벗어날 수 있다.
우리 고향은 하늘 아래 시골 산골이다. 나 어릴적에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함께 살았다. 부자 집은 머슴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자 집의 큰아들이 재산을 다 말아먹었다. 하지만 어느 가난한 집의 자녀들이 3층짜리 집을 짓고 지금 살고 있다. 또 다른 가난한 집안의 자녀는 호주 탄광에 몇 년간을 일하여 돈을 벌어와 도시에 여러 채 아파트를 샀다고 들었다.
이처럼 돈은 돌고 돈다. 부동산도 세월의 흐름 따라 소유자가 바뀌고 또 바뀐다. 그러니 무주택자라고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다음에 내가 그 아파트, 그 주택, 그 부동산의 소유자가 될 차례다. 희망을 가져라. 직장동료나 친구들 대부분은 나처럼 월세살이에서 탈출하여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무주택 출신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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