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지방교육도시 바욤봉에서 8개월 동안 살면서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은 그레이스 선생님이다. 검은 피부에 눈이 크고 키 작은 막 대학을 졸업한 자상한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기에 손색이 없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에 의해 유렵인들이 발견하였고 16세기 말엽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은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2차 대전 때는 일본에게, 전쟁이 끝나고는 미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스페인,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혼혈 등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나라다. 그중 말레이 족이 대다수이며 필리핀 원주민은 소수다.
그레이스 선생님은 등치가 작은 말레이 족 이거나 필리핀 원주민에 가까운 외모의 여성이었으며 머리가 똑똑했는지 필리핀 최고의 대학교인 UP(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출신이다.
그레이스의 나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아마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지 6개월 정도 지날 때쯤 그레이스의 배가 조금씩 부풀려 오르기 시작했다. 임신했냐고 물었을 때 한사코 아니라고 했는데 우리가 바욤봉을 떠날 무렵에는 임신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켜지고 있었다.
그레이스 집은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구몬 스쿨의 건너편에 있었다. 구몬 스쿨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고 조그만 개울의 다리를 지나면 그레이스 목재 집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구몬 스쿨 선생님이었는데 교장선생님과 다투고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그레이스 가정은 엘리트 집안이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대학교수였고 남편은 UP(University of the Philippines)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으며 국회의원(하원)에 출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비록 낙마했지만), 필리핀은 미국처럼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 국가이다.
대학교수 출신 시어머니는 팔순이 넘어 보였다. 그레이스가 과외비를 받지 않고 시어머니가 받았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다.
한 번은 현관 앞에서 시어머님을 만났다. 그녀는 나를 보고 “트러스트”라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을 했다.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TRUST>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팔순의 시어머니는 서로 믿고 신뢰하자는 의미로 나에게 TRUST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레이스와 2시간 동안 영어로 대화를 하면 머리에 쥐가 난다. 그래서 중간에 쉬운 시간을 가졌다. 쉬는 시간에 비 내리는 풍경을 보면 우울해지곤 했다. 나는 비를 보며 이런 생각을 가끔 했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에 와서 이런 생고생을 왜 하지”, 사실 나를 위해서 필리핀에기 온 게 아니다. 아이들이 영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을 깜빡 잊을 때가 있었다.
똑똑한 선생님 그레이스는 아는 것도 참 많았다. What is this?라고 우리 아이들이 이것저것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아도 그레이스는 자상하게 알려 주었다. 아이들이 그레이스를 좋아했고 그레이스도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마 그레이스 선생님 입장에서는 외국인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게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고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과외비로 받은 수입도 넉넉했을 것이다.
과외 비는 시간 단위로 계산해서 현금으로 지급했다. 과외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두 초등학생과 나까지 세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받았기에 적은 보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신 초등학교 선생 월급이 20만원이라도 들었다. 필리핀 선생들의 급여는 그리 넉넉하지 않다. 필리핀은 인건비가 아주 싼 나라다.
필리핀은 타갈로그어와 영어를 공식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세부아노어, 일로카이노어, 힐리가이노어 등 수십 종의 다른 지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 지방에서 영어를 배우는 환경은 썩 좋지 않다. 학교에서는 영어로 수업하지만 학교 밖에서는 타갈로그어나 지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영어가 생각보다 많이 노출되지 않은 환경이었다.
영어 배우러 필리핀까지 왔는데. 그것도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5시 30분 정도(경기도 파주에서 부산까지 이동거리보다 더 멀다.) 걸리는 이곳 루손섬 북쪽 바욤봉까지 왔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영어 배울 일상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직 초등학교 선생님을 과외 선생님으로 모시고 영어를 배워야 했다.
아이들이 그레이스 선생님에게만 과외를 받을 것이 아니었다.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쳐주신 또 다른 과외 선생님도 있었다. 선생님 이름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아마 아내는 기억할 것이다. 주로 아내가 그 선생님하고 대화를 자주 했으니까.), 그 여선생님도 아이들을 참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나중에 구본 스쿨 교장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고서 그 선생님은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교장선생님이 자기 학교 선생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다.
우리 아이들이 구본 스쿨에서 메소디스트 스쿨로 전학했기 때문에 교장선생님은 우리를 싫어했다. 교장선생님이 과외를 방해했던 것이다.
구몬 스쿨 옆쪽에 학원이 있었다. 학원 건물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2층 새 건물이었다. 이 학원 소유자도 구몬 스쿨 교장님이다. 나는 이 학원에서 1개월 영어를 배우려 다녔다. 선생님 직접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영어학습지를 푸는 과정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오전에 그레이스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웠다.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이 형편없었기에 말하기 듣기 연습이 필요했다. 15년 전 직장 들어온 이후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영어로 하는 대학원 수업을 듣는데 엄청 불편했다. 그레이스와 2시간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게 내가 영어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그레이스 선생님과 관계가 항상 순탄치만은 않았다. 문화의 차이, 언어 소통의 차이, 서로 간의 신뢰가 부족해서 트러블이 이었다.
어느 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트라이시클을 타고 그레이스 집에 갔다. 그런데 집 대문에 메모장이 붙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과외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Notice였다.
그 메모지를 보는 순간 얼마나 황당했던지 마치 만화책에 나온 인물이 심한 공포감을 느낄 때 하늘로 솟는 머리카락의 그림처럼 내 머리카락이 위로 솟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50평생을 살면서 머리카락이 솟구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행히 서로 오해를 풀고 며칠 후에 과외수업이 재기되었고 바욤봉을 떠난 그날까지 그레이스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은 영어를 배웠다. 바욤봉을 떠나는 날, 아이들과 내가 공부했던 공간인 그레이스 집 거실에 놓여 있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 옆에서 그레이스와 사진도 찍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함께 나누었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촬영 할 때 그레이스는 수줍어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마 임신한 몸이 여서 사진을 찍는 게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아내가 그레이스 선생님과 연락을 했는데 첫째 딸을 출산했고 그 이후에도 몇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 그레이스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필리핀 지방도시 바욤봉에서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특히 낯선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안정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그레이스 선생님이 일정 부분 커버해 주었다. 필리핀에서 차분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진 그레이스 선생님을 만난 게 아이들에게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