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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유학 12

믿음 소망 사랑

by kddhis 2024. 1. 2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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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석사 논문 작성에 도움을 준 사람은 SMU대학교 <아이 반> 교수였는데 키가 작고 검은 피부를 가진 오리지널 필리핀 사람이다.

 

 

아이 반 교수는 SMU에서 학부생들을 가르쳤고 사회과학대 학장(Dean) 밑에서 잡다한 일을 도맡다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 반이 정교수는 아니고 조교수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아이 반 교수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 반 교수는 쾌활하고 가끔 웃는 얼굴이 다정해 보였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를 실망시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와 아내는 아이 반 교수를 믿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리서치도 해야 했고 현장 답사도 가야 했기에 어느 토요일에, 아이 반 교수의 도움으로 현장 답사를 갔다.

 

 

나의 논문의 주제가 투어리즘(여행 관광)이었기에 현장답사 장소로 라이스 테라스로 유명한 바나웨로 결정했다. 바나웨 라이스 테라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필리핀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봉고차를 렌트하여 아들 둘을 데리고 아이 반 교수와 함께 바나웨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바나웨 라이스 테라스가 보이는 빗탈진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기억 빼고는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내가 라이스 테라스를 보고 깊은 인상은 받지 않은 이유는 내가 농촌출신이기 때문이다. 라이스 테라스는 우리 식으로 천수답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바나웨 라이스 테라스는 필리핀의  선조들이 수작업으로 벼농사를 짓기 위해 급경사진 산비탈진 땅을 천수답으로 층층이 만들어 놓은 논이다.

 

 

오래된 일이라 그런지 이 여행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분명 운전기사도 함께 갔었을 텐데 운전기사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나웨를 떠나 그 지방 시청(관공서)을 찾아갔는데 시청 건물이 산 꽂대기 평평한 평지에 있어서 놀랬다. 주민들이 이곳까지 어떻게 오지, 상당히 불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동하는 중간중간에 마을을 지났는데 시골 마을사람들이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흑백 TV가 처음 보급되던  1970년대의 우리나라 시골 풍경을 연상시켜 주었다. 사람들은 필리핀 권투선수, 매니 파퀴아오의 권투경기를 털레비전으로 보고 있었다.

 

 

매니 파퀴아오는 필리핀 권투선수이자 정치가인데 필리핀 사람들은 매니 파퀴아오를 필리핀의 자존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만큼 필리핀 사람들은 매니 파퀴아오를 세계 권투챔피언을 넘어 필리핀의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산골 마을에서도 매니 파퀴아오의 권투경기를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어렵게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졸업논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석사 논문을 작성하였는데 제출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해야 했다.

 

 

발표준비를 위해 나는 틈만 나면 발표 자료를 읽고 읽어 외우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영어로 쓴 논문이고 영어로 발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 때문에 심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논문 발표 날이 나가왔다. 발표 당일 나는 감기 기운이 있었지만 아프다고 미룰 수 없는 노릇, 이유도 핑계도 편명도 소용없었다. 발표를 꼭 해야 했다. 왜냐하면 논문을 통과해야 하루라도 빨리 귀국할 수 있으니까.

 

 

발표 장소에 들어갔는데. 발표 단상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우리 학장과 내 지도교수 아이 반 교수가 있었고 우측에는 부총장과 또 다른 교수(내 논문 비평하는 측)가 앉아 있었다.

 

 

아니 석사 논문 발표하는데 학장이나 부총장까지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황당했다. 거기에다 청중으로 대학원생까지 도합 40에서 50명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그러잖아도 논문 테스트를 받는 자리인데 부총장이 오고 50명 청중까지 있으니 나로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하라. 순서대로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가 끝나고 아이 반 교수는 처음에 내가 긴장했는지 너버스(nervous) 했으나 발표시간이 지날수록 그런대로 발표를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진짜 문제는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발표야 미리 준비한 자료를 보고 한다지만 질의응답 시간에는 무엇을 물어볼지 알 수 없고 특히 영어로 질문할 건데 영어 듣는 실력이 부족한 나는 또 한 번 초긴장을 했다

 

 

염려와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부총장이 질문을 했는데 내가 엉뚱하게 답을 한 것이다.

 

 

부총장의 질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이 논문 작성을 위해 리서치(사람들을 직접 만나 설문을 했는지?)를 직접 했냐고 물었는데, 나는 부총장의 질문을 잘못 알아듣고  “NO”라고 답을 했다. NO라는 나의 응답에 발표장이 순간 술렁거렸다. 나는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했다.

 

 

그때 마침 여자 흑기사가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다.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본 아내가 통역을 해주어서 간신히 오해를 풀고 상황이 정리되어 발표가 무사히 끝났다.

 

 

논문 발표가 끝나고 연회가 이어졌다. 교실에 차례 놓은 뷔페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연회는 바아흐로 내 논문 발표의 완결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렇게 겨우겨우 논문 심사를 통과해 SMU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다시는 이런 석사과정을 밟으라면 한사코 사양하겠다. 영어가 제일 걸림돌이었다. 영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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