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특이한 고향 친구 한 명 있다. 그와 나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놀고 같은 학교(국민학교와 중학교)에 다녔고 공부는 대충 적당히 했으며 놀기에는 열성적이었던 순진한 촌 뜨기였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별 의식이나 작별 인사도 없이 우리는 헤어져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대도시로, 그는 읍소재지 고등학교에 갔다.
그 이후 우리는 서로 만날 기회는 별로 없었으며, 추석이나 설 명절에도 어쩌다 우연히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어릴 때처럼 서로 정겹지는 않았다.
서로가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마음까지 멀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와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서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과 다르게 우리 관계는 서먹했다.
사실 친구는 공부 못하는 꼴통만 다니는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이 학교는 지역에서 공부하지 않고 엉뚱한 짓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걸로 명성이 자자했었다.
그가 그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건달 비슷한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추측하건대 친구는 수업 빼먹고 쌈박질하고 약한 친구 괴롭히는 싸움 잘한 힘센 학생, 속된 말로 날라리 같은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친구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삐뚤어지게 세상을 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언제부터인가 폭행과 절도로 경찰서를 들락 거리다가 끝내 수년간 교도수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황금 같은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을 교도소에서 대부분 지낸 것이다.
나는 그 친구와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기에 그가 이삼십 대에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끔 고향 집에 가면 어머님께서 그 친구의 소식을 듬성듬성 두리뭉실하게 알려주었다.
시골은 서로 이웃처럼 지내기에 옆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 지기에 어머님도 친구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님을 통해 듣는 것 말고는 그 친구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 친구는 성장하면서 체구가 체조선수처럼 단단하고 야무진 체형으로 바뀌어서 누가 감히 그 친구를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그의 근력과 힘은 막강했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학생의 나이에 그는 육체적 힘의 과시와 만용, 외형적 탐욕 등으로 남 괴롭히는 엉뚱한데 젊은 힘과 에너지를 발산했던 것이었다.
그 친구가 교도소에서 어찌나 말썽을 부렸던지. 한 번은 부모님이 면회를 갖는데, 교도관이 그 친구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은 광경을 그의 부모님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교도소에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쌩 날 리를 치는 친구, 아무도 못 말리는 친구였던 것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한동안 홀로 계신 아버님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 친구와 함께 한 동안 시골집에서 살았으며 그들 사이에 딸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여자 친구는 딸을 남겨둔 채, 혼자 집을 나가 버린 바람에 할아버지가 손녀를 먹이고 재우고 학교를 보내며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다.
40대가 된 친구는 가정과 직장 등 사회 어디에서도 안정된 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때 자기 형이 운영하는 영세한 제조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50 언저리쯤 되어 우리는 오랜만에 그의 집에서 만났다. 내가 설날을 맞아 고향 집에 온 것을 알았던지 나에게 연락을 해서 그의 집에 가보니 앞마당에서 쇠석판 위에다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전히 거친 말투, 너무 세속적인 이야기, 생각하는 게 아직도 이삼십 대(二三十代 )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그와는 말이 잘 썩이지 않았다. 날씨도 춥고 술도 못 마시고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아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고문처럼 느껴져서 나는 일찍 술자리를 더나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의 형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에서 번듯한 직장을 잡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 친구가 생각날 때면 가끔 또 다른 말썽꾸러기 고향 선배가 떠오른다. 그 선배는 부모님과 고향인근 대도시에서 살고 있었기에 방학 때나 명절 때 그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에 오곤 했었다. 그래도 고향 선후배들은 그의 이름과 얼굴을 다 알고 잘 지냈었다.
사실 나는 그 선배와 같은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친척도 아니고 그와 함께 놀지도 않았기에 그가 어떤 선배이고 학창 시절이나 사회생활을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에 대해 게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딱 하나, 그 역시 우리 친구가 다녔던 그 꼴통 공업고등학교에 다녔다는 사실
그 선배도 친구처럼 등치가 폭력 영화에 나오는 조폭과 똑같은 몸 체형이었다. 스포츠머리에 기골이 장대하고 야무지게 생겼으며 넓은 어깨가 떡 벌어져 걸음걸이가 영락없는 조폭이었다. 그를 보면 영화 속 조폭을 보는 듯했다.
그 또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골통짓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속을 썩인 그의 불량스러운 행동을 구구절절 나열하지 않아도 비디오다.
하지만 그 선배는 내 친구와 완전히 다를 말썽꾸러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서울 강남에서 술집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스포츠머리를 한 조폭이 옆구리에 작은 검정가방을 끼고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돈 걷는 폭력영화에서 나오는 익숙한 장면이 이 선배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 선배는 강남에서 술집을 직접 운영해서 돈을 벌었던지, 아니면 술집에 일수를 놓아 달러이자로 부를 일궜던지, 그것도 아니면 고급 술집에 폭력으로 돈을 뜯어내 재산을 불러든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큰돈을 번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대권 같은 2층 집을 지어주고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가 부자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 사업을 청산하고 지방 대도시에서 건설업을 한다고 한다. 말썽 피우던 엉뚱한 선배가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고향 친구와 선배, 둘 다 말썽쟁이였지만, 스포츠머리의 조폭 같은 선배가 보여준 것은 생각이 있고 개념이 있으면 한 때의 무지함을 깨닫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 착하게 남부러움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검사라고 해서 의사라도 해서 모두 인품이 출중한 것이 아니듯이, 조폭도 조폭 나름이고 깡패도 깡패 나름이라 하겠다. 조폭이라고 인간성이 다 더럽지도 않고 멍청하지 않으며 그중에 나름 똑똑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가는 조폭도 더러 있다. 이 고향 선배가 그 대표적인 모범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