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온 그날, 아버님의 첫 경운기가 우리 집 앞마당에 배달되었다. 그날은 동생이 군 입대를 앞두고 집에 들렀던 날이기도 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88 하계올림픽을 몇 달 앞둔, 노란 개나리가 만개한 어느 푸르른 봄날이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경운기를 운전했다. 여러 번 물건을 싣고 고향 집과 논밭을 오갔다. 이후 막내 동생까지 우리 형제 넷은 차례로 경운기를 몰며 아버님의 농사일을 도왔다. 아버님도 곧 경운기 운전을 익히시고는 농사일로 들과 밭으로 능숙하게 몰고 다니셨다.
농사에서 경운기는 필수적인 농기계다. 벼, 딸기, 배추, 수박 등 각종 농작물을 나르는 것은 물론이고, 농약 살포, 벼 탈곡, 심지어 교통수단까지 다양한 용도로 경운기가 활용된다. 경운기는 그야말로 농촌의 만능 기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버님은 면 소재지에 볼일이 있을 때면 늘 경운기를 몰고 다니셨다. 때로는 어머님을 경운기 뒤 칸에 태우고 들과 논, 그리고 면 소재지를 함께 오가셨다. 경운기는 그야말로 아버님의 손과 발이 되어 준 것이다.
털털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멀리서 들려오던 경운기 엔진 소음이 얼마나 시끄럽게 들렀던지 그 소리가 싫었다. 엔진 소음이 집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 투박한 엔진 돌아가는 소리는 아버님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힘 있는 신호였다. 우리는 소리만 듣고도 아버님의 경운기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들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아버님과 함께한 경운기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는 농기계이자 탈 것이었으며 친구였다. 하지만 2019년 10월, 면 소재지로 가시던 아버님께 그토록 사랑하던 경운기가 운명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형 교통사고였다. 부주의한 60대 여성 SUV운전자가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다. 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고 119 응급차는 아버님을 병원으로 옮기셨다.
그날 이후 5개월간, 아버님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셨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아버님은 끝내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시고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 폐차된 경운기와도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셨다.
아버님은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육중한 경운기를 몰고 고향 집과 논밭, 면 소재지를 오가던 아버님의 모습은 여전히 눈에 선하다. 여전히 귀에는,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그 익숙한 엔진 소리가 아련히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