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붕이 벼 집으로 된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아버님은 주기적으로 지붕을 새 벼 집으로 교체하셨는데, 2년마다 한 번 정도 지붕을 교체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방문은 엷은 창호지를 바른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겨울철에는 꽁꽁 얼어버려 문고리를 잡아 열며 방을 들락거렸다.
벽이 흙으로 만들어져서 방이 찬 공기에 노출되어 호흡기가 약한 나의 건강에 치명상을 주었던 허술한 집이었다. 이 때문에 비염이 어려서부터 나를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맹맹한 코, 비염은 집중력을 악화시켰고 집중력 저하는 학습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으로 가기 전에 왼쪽에는 텃밭이 있었다. 텃밭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삥 둘러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텃밭에 울타리를 친 이유는 집에서 키운 닭이나 오리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곳에 토란, 오이 등 여러 채소를 길러 자급자족했으며, 텃밭 맞은편에는 소 외양간과 변소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당시 화장실의 위생 상태를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변소라는 게 큰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놓은 다음 그 위에 널빤지 두 개를 좌우로 걸쳐놓고 판자 사이로 똥을 싸는 곳이었다.
특히 여름철에 대변 냄새는 곧바로 코를 자극했고 변기 주변에는 노란 구더기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혹시나 구더기가 내 다리로 올라오지는 않는까 걱정을 하며 볼일을 봤다. 위생 청결과는 한참 거리가 먼 미개인 수준의 화장실과 다를 바 없었다. 화장실 가는 것 자체가 고문이고 공포였고 고통이었던 시절이었다.
마당에서 집을 보았을 때, 중앙에는 대청, 대청 좌측에는 작은방, 대청 우측에는 큰방, 큰방 옆에는 부엌 등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대청 끝부분에서 서쪽 편으로 또 다른 작은 방이 있었다.
큰방은 조부모님이, 대청 끝쪽의 구석진 작은 방은 부모님, 또 다른 작은 방은 우리 형제가 기거했다. 널찍한 대청에는 쌀가마, 쌀통, 잡곡 등의 물건을 놓아둔 창고처럼 사용하였다.
나와 동생들은 큰방과 대청, 그리고 뒷방 등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희미하게 생각이 난다. 그때는 그 공간이 어린아이에게 놀이터처럼 넓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엌에는 솥 2개가 놓여 있었는데, 어머님은 한 솥에 밥을 짓고 다른 솥에서는 국을 끓여 내셨다. 부엌과 큰방 사이에 문이 있었던데,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바로 큰방으로 가져와 식구들이 함께 매끼를 해결하였다. 어머님은 이 부엌에서 한과, 칼국수, 토란국 등 온갖 맛있는 음식을 만드셨다.
초등학교 6년이나 중학교 1학년쯤에 아버님은 이 초라한 초가집을 허물고 외풍 없는 슬라브형 벽돌집을 새로 지었다. 집이 커졌고 신식 집이었지만 새 집이 모두 좋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가집은 남향이어서 동절기에는 따사로운 햇볕이 들었으며 하절기에는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었지만, 새로 지은 벽돌집은 서향으로 짓는 바람에 하절기에는 피하고 싶은 햇빛 때문에 저쪽에 있는 거실로 집출입하는 횟수보다 남쪽에 있는 부엌으로 연결된 문을 통해 집으로 들락거렸다.
그로부터 30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이 벽돌집을 허물고 철골조형 집을 새로 지었다. 가끔 고향집에 가면 생활환경이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에 살았던 초가집이 그리울 때가 있다.
전기가 없어서 호롱불 켜고 살았고 텔레비전이 없었기에 밖에 나가 친구들과 해 떨어진 줄 모르고 놀았던 그 추억이 아련히 생각난다.
지금의 거주 공간은 그 시절, 초가집에 비해 혁명에 가깝게 바뀌었다. 구더기는 구경도 못하고 똥냄새가 나지 않은 비대가 설치된 화장실, 바람 한 점 없는 조용한 실내, 에어컨과 난방으로 사계절 최적의 온도를 유지하는 냉난방 시설을 갖춘 아파트에 살지만 그때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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