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진부령 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은 군부대 정문이었습니다. 이곳이 오늘 걷기 대회 출발 지점이자 트레킹 행사장이다.
행사 관계자의 안내로 출석부에 참석 서명하고 출발지 앞에 마련된 행사장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하는데, 저만치서 다른 버스를 타고 온 아내가 행사 관계자에게 오늘 일정을 문의하는 아내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아내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놀란 이유는 이렇다.
며칠 전에 아내가 전화로 행사 일정을 문의했을 때 걷는 시간이 왕복 4시간이고 하산해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는데 지금 행사 현장에서 편도 5시간이 걸린다는 행사 관계자의 말을 듣고 아내는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기절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라. 아내의 머리는 마치 바닥에 떨어진 막 끓인 신라면 면처럼 흐물흐물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집에서 차로 5시간 걸려 강원도 인제군에 도착해 어제 펜션에서 하룻밤 자고 오늘 행사장에 왔는데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트레킹대회를 포기할 수 없고 더욱 난감 해진 것은 점심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 휴경인데 하물며 5시간을 걸어서 산 정상에 올라갔다 다시 돌아와야 하는 걷기 여행에 먹을 게 없다면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보도 여행이 아니고 ‘고행 길’ 떠나는 여행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않겠는가.
아내는 안절부절못하고 아들과 황급히 도로 건너편 편의점으로 넘어가서 카스테라를 점심 대용으로 사 왔다.. 아마 편의점에 점심으로 먹을거리가 마땅치 않아 카스테라 빵을 택한 모양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모른 채 했다. 나까지 나서서 걱정한다면 속 타는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먹다 남은 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가져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먹밥이라도 준비하지 않았다면 쫄쫄 굶어가며 18킬로미터를 걸어야 할 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 제때 탄수화물(밥)을 섭취하지 않으면 거의 실성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즉 배고픔을 절대 못 참는 체질을 타고난 유별난 사람이다.
서둘려 아들 배낭에 카스테라를 쑤셔 넣고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사장에는 무질서하게 300여 명에 가까운 참가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지역 단체장, 높으신 의회 의장, 부대장 등 순으로 짧은 인사말이 이어졌다.
기념 식순 마지막으로 군부대 관계자(여군)는 이곳이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임을 강조하면 군사보호시설 촬영금지, 정해진 행사 시간 준수 등을 참가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구체적으로 여군이 어떤 당부사항을 말했는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웅성거리는 참가자들의 잡담 소리때문이기도 했고 전달 사항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집중해서 듣지 않아 서다.
진부령 정상인 트레킹대회 출발 지점이 군부대 정문이고 부대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 보면 이곳은 아무나 어느 때나 들어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로 민간인 통제구역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 년에 딱 한 번 10월 트레킹행사가 개최되는 단 하루만 민간인에게 개방되는 북한과 인접한 민간통제 구역이다.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특혜라고 할 수 있다.
향로봉 정상에 미군 부대가 있고 하얀 인공위성 통신망이 설치되어 있다. 멀리에서도 정상의 통신망이 보였지만 정상에 올라와서야 비로소 통신망 실제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부대 관계자의 주의 사항을 끝으로 기념행사를 마치고 참가자들이 향로봉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도로는 군부대 작전 도로로 폭이 넓어 차량 운행이 가능하면 어느 지점에서는 차량 교차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비포장 도로였다.
경사도는 높지 않았고 자갈, 돌이 깔러 있는 울퉁불퉁한 도로는 시골 고향 옛 신작로를 역상 시켜 주었다. 군용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정도로 단단하게 다져진 도로였다. 빗물로 도로가 유실되지 않도록 시멘트와 철근으로 포장된 일부 구간도 눈에 띄었다.
우리 가족은 다른 참가자보다 늦게 출발하기도 했고 걷는 속도도 느려 제일 꼴찌 그룹에 속해 걸어갔다.
자연 그대로 청량한 깊은 산길에 보건소 응급차량, 지역신문사 보도 차량, 행사 차량 등이 우리 곁을 비켜 갈 때마다 매연과 흙먼지를 날려 차량이 밉상이었다.
잊을만하면 차량이 지나가 속상했지만 그래도 차량이 빨리 지나가도록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곤 했다. 그렇다고 행사 주최 측에 민원을 제기할 수 없어, 그냥 속으로 삭이고 자연풍경을 보고 걷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아들과 나의 걸음으로 향로봉 정상까지 빠르면 3시간 30분, 느려도 4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아내는 빨라도 5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다.
높은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이 깊이 파여 있어 산 정상까지 도달하는 길은 산 능선을 따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상까지 똑바로 가면 가까운 거리를 지그재그로 길이 나 있어서 정상까지 거리가 몇 배는 길어진 것이다.
아들은 엄마가 걱정이 되었는지 우리보다 앞서가다가 기다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걷다가 쉬고 쉬었다가 걷기를 쉴세 없이 반복하면서 4시간 넘게 걸어서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다.
아내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다리가 짧고 발이 작아 걷기에 최악의 조건을 타고 난 덕(?)에 힘겨운 걷기를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걷는 모습이 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 힘겨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아마 내 예측이 얼추 적중하였을 것이라 장담한다.
오전 8시에서 8시 30분 사이에 출발해서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30분쯤이였을 것이다. 도착 시간은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군사시설 촬영을 못하도록 향로봉 정상 이전 1 km지점에서 행사 주체 측이 참가자의 핸드폰을 모두 수거해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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