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가까이 걸어서 향로봉 정상에 도착했다. 아내는 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흙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쓰러지듯 잠자는 포지션을 취했겠는가. 아내는 내 무릇을 베개 삼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5시간 걷는 행군은 아내에게 고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내를 여기 정상까지 오게 한 동력은 바로 모성애이다.
아들의 권유가 없었다면, 트레킹대회에 오지 않고 지금쯤 낮잠을 잔다던가 침대에서 유튜브로 오락 동영상을 보면서 여유로운 휴일을 보내고 있을 텐데. 아내는 지금쯤 여기 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향로봉 정상 평지에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참가자들은 사방에 흩어져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밥에 김가루를 버무린 주먹밥과 카스테라를 허겁지겁 먹고 정상 꼭대기에 올라갔다.
청명한 가을 날씨 덕에 금강산이 보이고 북한의 산과 들판도 볼 수 있었다. 동해도 보였는데 바다인지 하늘인지 육안으로 좀체 구분하기 어려웠다. 얼핏 보면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파란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보였다.
사진 촬영을 허가받은 행사 관계자로 보이는 아저씨가 핸드폰을 수거당한 참가자들을 위해 똑같은 위치에 참가자를 세워놓고 기념사진을 쉴세 없어 찍어 주고 있었다.
우리도 순번을 기다려 산 정상을 배경으로 개념 촬영에 동참했다. 시간 지나면 남는 게 사진밖에 없다고 한다. 먼 훗날 이 사진은 우리 가족이 2024년 10월 4일에 향로봉 정상에 다녀갔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즉 향로봉 정상에 왔다는 인증샷이다.
우리는 향로봉에 오래 머무를 처지가 못 되었다. 하산 길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져 쉴 마음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는 서둘러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산 길이 내리막길이라서 올라올 때보다 한결 힘은 덜 들었다.
핸드폰을 수거한 행사 안내 부스에 이르렀을 때, 행사 차량에 참가자가 탑승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이거다 싶었다. 아마 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들과 나는 동시에 동승하기 위해 차량으로 달려갔다.
탑승할 수 있는지 행사 관계자에게 물었고 우리 3명까지 탈 수 있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우리가 탑승하고 바로 다른 참가자들이 동승을 원했지만 때는 늦으리. 만차가 되어 더 이상 추가 탑승은 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이 승합차의 마지막 승객이 된 것이다.
만약 이 먼 길을 걸어서 내려갔더라면 아마 꼬리뼈 통증이 있는 아내는 병이 났거나 신체 한 곳이 망가졌을 것이다. 어찌 아찔하지 않았겠는가.
비포장길을 뒤뚱뒤뚱 좌우로 심하게 흔들거리며 달리는 승합차였지만 차 안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출발하지 몇 분 만에 조수석에 앉은 나는 졸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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